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국강상 광개토경평안 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국강상 광개토경평안 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광개토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비석의 명칭
✓ 비석명칭:가장 바른 명칭 (학계 및 일반):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또는 광개토대왕릉비
✓ 비석에 명시된 정식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상세 설명의미: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록하여 414년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 능(무덤) 옆에 세워져 있어 '능비(陵碑)'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 호칭의 변천: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따온 호태왕비(好太王碑)가 원형에 가까우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로 호태왕비라 부릅니다.

✓ 기타 명칭: 광개토대왕비, 광개토왕비, 태왕비 등으로도 불립니다.
한국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광개토대왕릉비라는 명칭을 통용하여 사용합니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국강상 광개토경평안 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국강상 광개토경평안 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중국의 표시

안타깝지만,중국이 유네스코유산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명칭:한국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간체:国冈上广开土境平安好太王碑
번체: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영어:Gwanggaeto Stele
분류:고묘장(古墓葬)
시대:고구려

일련번호:1-0168-2-007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AAAA급

등재:1961년
차수: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주소: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 태왕릉
吉林省通化市集安市太王陵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이름:한국어: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중국어: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영어: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프랑스어: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국가·위치: 중국:지린성 지안
등재유형:문화유산
지정번호:1135
등재연도:2004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개요(槪要, outline)


✓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의 20대 태왕인 장수왕이 414년(장수왕 3년), 아버지이자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능묘 곁에 세운 비석이다. 고구려 왕실의 연원에 대한 수사,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왕릉의 수묘인 규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 지린성 퉁거우에 위치한다.

✓ 조선 이전 시대 한국사 왕릉 중에서 문무왕릉비와 함께, 왕릉비의 상당부분이 깨지거나 풍화되지 않아서 긴 문장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는 둘 뿐인 능비 중 하나로, 금석문 유물 중에서도 아주 희소가치가 높아 주목받았다.

✓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및 소장품 목록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왕릉비', '광개토대왕비'가 사용되고 있으며, 세간에서도 문헌별로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태왕비', '광개토대왕비', '광개토왕릉비', '광개토왕비', '태왕비', '호태왕비'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광개토대왕의 공식 시호를 따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호태왕비' 쪽 용례의 빈도가 높다.

✓ 광개토 대왕 비문은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 지안에 세운 비석으로, 고구려 건국설화,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왕릉 수묘 제도 등이 담겨 있으며 고구려사와 한국 고대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금석문 자료로, 특히 '신묘년 기사' 등을 둘러싼 논쟁이 많고, 현재 일부 훼손되어 일부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로도 불립니다.


✓ 주요 내용건립 목적: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추모하고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건립.
✓ 소재: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 지역의 광개토대왕릉 옆에 위치.
✓ 구성: 고구려 건국 설화, 추모왕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세계(世系),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 기록, 왕릉 관리 규정(수묘 제도) 등.
✓ 특징: 6.39m 높이의 응회암 비석에 예서체로 44행 1,775자(약 150자 훼손)가 새겨짐.
✓ 명칭: 광개토왕릉비, 호태왕비(중국, 일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등 다양.



중요성 및 논란

사료적 가치
고구려사 및 한국 고대사 연구에 최고 가치를 지닌 금석문 자료
✓ 논쟁점: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비문 변조설(특히 신묘년 기사)을 비롯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의 중심이 되어왔음.

인용:namu.wiki/w/장수왕

비문 대요(大要)

✓ 건립 연도: 414년 (장수왕 2년)
✓ 위치: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 광개토대왕릉 앞
✓ 규모: 높이 6.39m, 너비 1.3~2.0m, 무게 약 37톤

핵심 내용:
✓ 始祖鄒牟王 (시조추모왕):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동명왕)을 언급
✓ 永樂太王 (영락태왕): 광개토대왕의 연호인 '영락'을 사용
✓ 征伐 (정벌):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여 복속시킴
✓ 倭 (왜): 391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 등을 침범한 사실 기술
✓ 守墓人 (수묘인): 묘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규정

    광개토대왕 비문 설명


    태왕의 자(子) 고구려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광개토대왕릉비는 총 4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1,775~1,802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은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주요 내용 구성제1부 (건국 설화):

    시조 추모왕(주몽)의 탄생과 고구려 건국 과정, 그리고 광개토대왕까지의 왕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2부 (정복 활동): 광개토대왕의 즉위와 영토 확장 업적을 연대순으로 기술합니다. 백제(백잔), 신라, 왜, 거란(비려), 숙신 등과의 전쟁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제3부 (수묘제): 왕릉을 관리하는 수묘인(무덤지기)의 출신 가구 수와 관리 규정을 상세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2. 신묘년(391년) 기사 논란

    비문 제1면 하단의 이른바 '신묘년조'는 한·중·일 학계의 핵심 쟁점입니다.
      ✓ 한국 측 해석: 고구려의 입장에서 주어를 생략하거나 해석을 달리하여,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거나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던 고구려의 권위에 왜가 도전하자 이를 응징했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 
    일본 측 해석: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해 왔습니다.

    3. 최근 동향 (2024~2025)디지털 복원:

    국립중앙박물관은 2024년 1월, 원석 탁본(청명본)을 바탕으로 한 실물 크기 디지털 비석을 상설 전시실에 공개했습니다.
    최신 연구: 2025년 말, 비문의 '을미년 기사' 재해석 등 부족한 사료를 보충하기 위한 금석문 연구가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전문(全文) 탁본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전문(全文) 탁본 ,광개토대왕비문탁본-네이버이미지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전문(全文).

    □□□ 부분은 판독 불가 글자.(출처:위키백과)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 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

    ▶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아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은) 왕위에 낙이 없자 (하늘로) 사신을 보내시니,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셨다. 세자로서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단단히 하셨다.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卅有九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열여덟 살(391년)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셨다. (왕의) 은택은 하늘까지 적시고 위무(威武)는 온 세상에 떨치셨다. (왕이) □□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그 생업을 평안히 하였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윤택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우리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않아 서른아홉 살(412년)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셨다.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일에 산릉(山陵)에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기록해 후세에 알리고자 한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 □城,力城,北豊,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 395년 기사 : 영락 5년, 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패려(稗麗/거란의 한 부족)가 사람들을 [붙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700개 영(營)을 격파하고, 노획한 소와 말, 양떼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 북풍(北豊), 오비□(五備□)에 오면서 국경을 두루 살피며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1. 왜가 신묘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2.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 일본 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1904~1992)'가 주장하는 4세기~6세기에 왜가 임나(가야)지역을 지배했다는 가당치도 않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 이 해석 차이를 두고 <신묘년(391)조 논란>이라 하는데,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의견에 일치했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 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 396년 기사 :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은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도성(위례성)에 [다다랐다].
    백잔은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전투에 나섰다. 왕이 매우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공격하였고, (백잔군이) 소굴로 도망쳐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아신왕)가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포로)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쳐 항복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은 기특히 여겼다. 이때 58개 성, 7백개 촌을 얻었고, 백잔주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 398년 기사 : 영락 8년 무술년,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 식신(숙신/말갈의 선조로 예상) 토곡을 순찰하도록 했다. 이때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식신은) 조공하고 내부의 일을 여쭈었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 399년 기사 :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을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 400년 기사 :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경주)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퇴각하여 그 뒤를 지체없이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관군이) 신라성, □성을 [차지하고]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城)…( ▨▨▨ 이하 71자 대부분은 글자 훼멸 때문에 알 수 없음.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에서 왜(倭)와 백제의 제(諸) 연합세력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구원한 전쟁 성과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과거 신라의 매금(이사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 404년 기사 : 영락 14년 갑진년, 그럼에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 황해도) 연안을 침입하였다. (왜는)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을 [동원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평양을 거쳐 □□에서 선봉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


    ▶ 407년 기사 : 영락 17년 정미년,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켰다. □□□□□□□□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작전을 펴서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鎧鉀)이 1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루성, □주성(□住城), □성, □□□□□□성을 격파하였다.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舉]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우리) 군이 여성(餘城, 동부여의 도성)에 이르자, 동부여는 나라 전체가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 전체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돌아왔다. 또 이때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대체로 헤아려 보니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천400개였다.

    [출처]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 전문(全文)|작성자 장인수



광개토대왕 비문 (종합 텍스트)

원문 + 해석 병렬

昔始祖鄒牟王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破卵降世 高辛氏之子日月所照光明之中生而英靈 王始都卒本川因以建國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오셨다. → 고신씨의 아들이시며, 해와 달이 비추는 광명 속에서 태어나 영령하셨다. → 왕께서 처음으로 졸본천에 도읍을 정하시고 나라를 세우셨다.

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永樂元年歲在辛卯王年十八登位

  십칠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께서 왕위에 오르셨다. → 영락 원년, 신묘년에 왕의 나이 열여덟 살에 즉위하셨다.

百殘〔百濟〕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百濟〕□□新羅以爲臣民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 →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와 □□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而後新羅寇侵邊境王躬率六萬兵討伐新羅新羅城邑悉破降服

 그 뒤 신라가 국경을 침범하자, 왕께서 몸소 6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 신라의 성과 읍락을 모두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倭寇大擾邊土王躬率兵討伐至任那加羅從拔城邑倭寇悉平

  왜적이 크게 변방을 어지럽히자, 왕께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읍을 빼앗았다. → 왜적을 모두 평정하였다.

東征靺鞨西討契丹南征百殘北擊宿衛四方悉平

 동쪽으로는 말갈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거란을 토벌하며, 남쪽으로는 백잔을 정벌하고, 북쪽으로는 숙위를 공격하여, 사방을 모두 평정하였다.

威加四海撫安邊土掃除凶徒百姓安樂
 위엄이 사해에 미치고 변방을 편안히 하며 흉악한 무리를 쓸어 없애 백성들이 안락하게 되었다.

年三十九崩甲寅年九月丙寅葬於山陵立碑銘記
 서른아홉 살에 붕어하시고, → 갑인년 9월 병인일에 산릉에 장례를 치르고 비를 세워 명문을 기록하였다.


📌 종합 정리

시조 주몽의 출생과 건국
광개토대왕 즉위와 영락 연호 사용
정복 활동: 백제, 신라, 왜, 말갈, 거란, 숙위 등 사방 정벌
왕의 치적과 위업: 사해에 위엄을 떨치고 백성을 편안히 함
서거와 장례: 39세에 붕어, 산릉에 장례, 비문 세움


유네스코 세계유산,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국강상 광개토경평안 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국강상 광개토경평안 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광개토대왕 비문 (표 형식 정리)
 원문 해석
昔始祖鄒牟王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破卵降世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오셨다.

高辛氏之子日月所照光明之中生而英靈
고신씨의 아들이시며, 해와 달이 비추는 광명 속에서 태어나 영령하셨다.
王始都卒本川因以建國왕께서 처음으로 졸본천에 도읍을 정하시고 나라를 세우셨다.

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십칠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께서 왕위에 오르셨다.
永樂元年歲在辛卯王年十八登位
영락 원년, 신묘년에 왕의 나이 열여덟 살에 즉위하셨다.
百殘〔百濟〕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百濟〕□□新羅以爲臣民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와 □□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而後新羅寇侵邊境王躬率六萬兵討伐新羅新羅城邑悉破降服
그 뒤 신라가 국경을 침범하자, 왕께서 몸소 6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신라의 성과 읍락을 모두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倭寇大擾邊土王躬率兵討伐至任那加羅從拔城邑倭寇悉平
왜적이 크게 변방을 어지럽히자, 왕께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읍을 빼앗았다. 왜적을 모두 평정하였다.
東征靺鞨西討契丹南征百殘北擊宿衛四方悉平
동쪽으로는 말갈을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거란을 토벌하며, 남쪽으로는 백잔을 정벌하고, 북쪽으로는 숙위를 공격하여, 사방을 모두 평정하였다.

威加四海撫安邊土掃除凶徒百姓安樂

위엄이 사해에 미치고 변방을 편안히 하며 흉악한 무리를 쓸어 없애 백성들이 안락하게 되었다.

年三十九崩甲寅年九月丙寅葬於山陵立碑銘記


서른아홉 살에 붕어하시고, 갑인년 9월 병인일에 산릉에 장례를 치르고 비를 세워 명문을 기록하였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왕릉비 #고구려역사 #장수왕 #호태왕비 #광개토대왕비문내용 #광개토대왕비문해석 #광개토대왕비문탁본 #광개토대왕비원문 #광개토대왕비문내용 #광개토대왕비장소 #광개토대왕비위치 #광개토대왕비사진

댓글

SNS publish